무엇 무엇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이 한 둘인가. <사회를 위한 디자인>, <인간을 위한 디자인>, 심지어 <모두를 위한 디자인>까지. 디자인이 위할 게 어찌 그리 많은지. 그나마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10%를 깎아줘서 다행이랄까.
이번엔 또 뭘 위하라는 것인가 하고 <플루리버스를 위한 디자인>을 읽었다. 플루리버스라니 메타버스보다는 참신해보였다.
이름도 낯선 글쓴이 아르투로 에스코바르는 인류학자다. 그의 말대로, 디자이너도 디자인 이론가도 아닌 그가 왜 디자인을 다루었을까? 디자인이 갖는 힘, 정확히 말해서 잠재력을 주목했다고 한다.
종종 비전문가가 디자인을 다룬 책에서는 디자인이 대상화되는 걸 발견한다. 디자인의 가치를 도구적으로 보면서 디자인을 활용하면 지구와 사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거나 디자인의 해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식이다.
이 책은 디자인의 어떤 움직임을 독려하는 독특한 입장을 보여준다. 디자인이 이렇게 움직인다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데 그것이 가능할지 계속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그런데 디자인이 어떠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강요하기 보다는 디자인의 잠재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회적 실천에 초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에스코바르는 자신이 디자인, 관계성, 전환을 다루는 수업을 7년간 맡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디자인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음을 밝힌다. 아울러 그가 라틴 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의 지역 액티비스트들과 협업하면서 대안적 경제, 생태학을 디자인과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협업의 핵심 개념이 ‘diseño de culturas(문화의 디자인)’였고 이것이 그가 마지막 장에서 정리한 자율 디자인(autonomous design)으로 발전한 것이다.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알만한 이론과 인물들이 이 책에 대거 등장한다. 게다가 주제에 따라 디자인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하기도 한다. 예컨대, 지속가능성을 다룰 때 사회적인 논쟁이 일어난 시점 뿐 아니라 생태적 디자인이 주장되는 시기(저자는 이안 맥하그가 출간한 <Design with Nature>(1969)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부터 최근의 주장까지 주목할 부분들을 설명한다. 그것이 오늘날 존재론적 디자인(ontological design)과 어떻게 만나는지도 빼놓지 않는다. 존재론적 디자인이라니. 아무튼 이른바 ‘지속가능한 개발’, ‘녹색 경제’로는 결코 지속가능할 수 없으며 존 에렌펠트(John Ehrenfeld) 교수의 주장을 빌어 “문화적 대격변(a cultural upheaval)”이 일어나지 않고는 지속가능성이 요원하다고 말한다.
더 이상 모던디자인에 바탕을 둔 인식으로는 지속가능성, 젠더, 불평등, 식민주의 등 오늘날의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없고 모던디자인 자체가 현재 작동하지 않음을 여러 번 확인시킨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디자인 인식을 고수하는한 아무리 혁신을 내세워도 자본에 봉사하는 전문가의 태도 때문에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사회민주주의 목표와 디자인을 일치시켜온 것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결국 디자인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연계시키지 않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서 짧고 굵게 질문한다. 빅터 파파넥의 책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실제 세계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를 거론하면서 그 세계는 무슨 세계(What “world”?)이고 실제란 또 어떤 것(What “real”?)이냐고 말이다. 이와 관련된 생각과 실천에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존재론적 디자인 접근의 기초라고 설명한다.
콜롬비아를 비롯한 남미의 다양한 행동주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존재론적 접근과 디자인을 연계하고 있지만 지역의 맥락을 모르는 탓에 남반구(Global South)의 문화 다양성 정도의 수준에서 이해했다.
그보다도 이 책에서는 자율 디자인이 중요한 개념이다. 에스코바르는 자율 디자인을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개념에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사회체계 이론으로 발전시킨 용어로도 잘 알려졌지만 이 책에서는 그 이전에 생물학자 마투라나와 인지과학자 바렐라가 살아있는 것(living beings)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끌어냈다. 유기체는 세포를 스스로 생성해내고 그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조작되는 것을 배제한다. 저자는 그럼에도 여러 요소들과 연결하고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 자율성 개념을 사회 문화적인 측면으로 설명할 때는 기 본지페(Gui Bonsiepe)의 주장이 인용되었다. 타율성(heteronomy), 즉 외부의 힘에 의해 지배받는 것을 줄이고 시민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기 결정, 자율 프로젝트를 위한 공간을 열어나간다는 부분인데 본지페가 디자인 관점에서 정의하는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급자족이나 고립된 생활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자율성을 자각하며 여러 공동체와 함께 하는 디자인(design praxis with communities)이고 그것이 곧 자율 디자인이다. 저자는 자율 디자인의 추정 원칙도 정리하고 개념도도 만들었다. 예컨대 ‘모든 디자인 프로세스는 그 디자이너와 관련 집단이 목적에 동의하고 대안을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의 진술과 가능성을 포함해야 한다’라는 항목이 있는데 토지 유실, 수질 오염, 여성 차별 같은 문제가 고려사항으로 적혀 있다.
저자의 이런 주장들이 자신의 철학을 단순히 디자인 버전으로 가공한 것은 아니다. 책의 내용으로 짐작컨대, 그는 비평적 디자인 연구(Critical Studies of Design), 사변적 디자인(Speculative design) 등 주목할 만한 디자인 담론을 검토하고 연구자들과 교류도 해왔다. 테리 어윈(전환 디자인), 에치오 만지니(사회혁신디자인), 토니 프라이(지속성, 디자인 정치)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면 책 제목에 플루리버스(pluriverse)를 내세운 이유는 뭔가. 에스코바르는 그가 기대하는 디자인 활동이 플루리버스의 맥락에서 작동된다고 믿는다. 엘리트 중심의 일원적인 지배 구조는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고 다수가 그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근대성과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지식인 집단의 일원인 에스코바르는 이 단일성에 저항하면서 지역사회, 공동체가 자율성을 갖는 각각의 ‘세계들’을 희망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에는 ‘the Making of Worlds’로 복수의 세계가 들어가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각각의 세계가 동맹을 이루는 관계이기를 희망하는데 달리 말하자면 서로 돌보고 존중하는 관계를 이루는 ‘지구와 더불어 사는 삶(living with the Earth)’을 지향하는 것이다. ‘급진적 상호의존(Radical interdependence)’을 이 책의 부제에 포함시킨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 같다.
언뜻 보면 이상주의자 같은 느낌마저 들지만 내용 자체는 꽤 진보적이고 정치적이며 현실 감각도 뛰어나다. 예컨대, 기어트 로빈크의 <Sad by Design>에서 언급된 벤자민 브래튼의 스택, 그리고 플랫폼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서도 등장한다. <Sad by Design>이 스택과 플랫폼으로 우리의 삶을 쪼그라든 슬픔을 이야기했다면 이 책 <Designs for the Pluriverse>는 스택을 포함한 그 모든 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루면서도 글자 그대로 ‘믿음(belief)’을 반복적으로 밝히고 행동을 독려한다.
사실 저자의 절실함도 느낄 수 있다. 오죽하면 디자인 동네에 손을 내밀었을까 하는 절실함 말이다. 그는 존재론적 정치학에 디자인을 위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썼다. 건축과 산업디자인 분야를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수시로 사용된 ‘situated’, ‘collective’, ‘relational’, ‘participatory’, ‘bottom-up’, ‘relocalize’, ‘subalten’ 같은 낱말은 결국 저항과 행동주의(activism)로 수렴된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면 누군가 “A design theory that enables us to live with this planet”이라고 서평을 남겼듯이 디자인의 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이 큰 숙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