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봄 <디자인 이슈>(Design Issues)는 학술저널 즉 글로 된 연구 결과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서문으로 시작하고 있다. “<디자인 이슈>는 보통 – 역사, 비평, 이론 간의 공통분모에 기반하여 – 과거의 기억과 현재에 대한 인식, 미래에 대한 지적 직관을 엮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왔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연구 자체가] 실제 ‘이야기하기’ 방식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살피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매 이슈마다 감각적, 지적인 직관의 렌즈를 제시하는 <디자인 이슈>는 이번 호에서 ‘내러티브narrative’와 ‘논의/논증argument’ 사이의 공통점에 관한 렌즈를 제공하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러티브와 논의 모두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용한 사물에 관한 내러티브는 안정적이고 신뢰할만한 논의에 기대어 있고, 강력한 논의 역시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에 의존한다.” 학술저널이라 하면, 대부분, 전문가들 사이에 정보와 견해를 나누는 텍스트로, 타 분야의 독자들은 접근하기 두려운 ‘어려운 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전문 기술적 내용 이외의, 특히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접근을 하는 글이라면 말 그대로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누구라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을 가져야 하고 이 모든 것들은 진실한 ‘이야기’를 납득할 수 있게 풀어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번 호 <디자인 이슈>에서는 모든 아티클들을 2021년 현재를 담아낸 ‘디자인 이야기’들로 해석한다.
‘실체적(친밀한) 케어: 의료수행자와 환자 간 변화하는 관계를 물질화하는 도구로서의 디자인’(Tangible Care: Design as a Vehicle for Materializing Shifting Relationships between Clinicians and Patients)에서 저자 카트리나 단클과 케이넌 아코글로는 ‘테크놀로지, 정책, 테크닉’(테크놀로지는 의료 기기적 부분, 테크닉은 의료 기술적 부분과 연관된 것으로 해석)이 의료 수행자와 환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덴마크의 디자인 대학과 SDM(Shared Decision Making공동의사결정) 센터의 협력 사례를 들어, 의료 기기 디자인을 통해 두 그룹의 교류를 높이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눈에 띈다. 이 글에서는 ‘돌봄care’이라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데 도움을 주는 의료 디자인이 어떻게 다학제적으로 효과를 높일 수 있을지, 말 그대로 ‘생명-과학life sciences’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다이내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물학적 연구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Biological Research: Upjohn, Will Burtin, and the Cell)에서 역시 생물학과 디자인 사이의 다학제적인 관계를 다룬다. 세포와 같은 초미세 단위의 물질을 과학적 모델로 만들어내는 디자인을 통해 디자이너-생물학자-의사-대중 간의 소통이 얼마나 효율적이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꾸준히 이루어져 온 활동이지만 이러한 ‘[분야간] 경계적 오브제’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논리적으로 엮어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비디오 게임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반가운 이야기도 한 편 등장한다. 영상 게임 영역은 빠르게 확장되는데 비해 이에 관한 역사적, 담론적 논의를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이때 ‘분리된 스크린: 지역 멀티플레이어 디자인을 통해 본 비디오 게임의 역사’(Split-Screen: Videogame History Through Local Multiplayer Design)는 상대적으로 더 의미가 크다. 이야기의 본체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비디오 게임의 흐름을 공유스크린플레이(SSP: shared screen play)의 흥망성쇠(혹은 역사 속 디자인의 흔적design vestigiality)를 통해 풀어낸 것이다. 저자들은 역사적으로 시기를 ‘아케이드’, ‘홈/퍼스널 컴퓨터’, ‘인터넷’ 시대로 구분하고 ‘경제적 이익’과 ‘기술적 이익’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SSP의 전개과정을 추적한다. 결론은 점차 배틀 아레나, 오픈-월드 디자인으로 변화하면서 SSP 방식은 사라지거나 완전한 변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으로 마무리된다. 비디오 게임에 문외한인 필자가 알아볼 수 있는 게임은 전설의 팩-맨Pac-Man 뿐이지만 30년간 거쳐갔던 게임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일 것이다.
디자인의 다학제적인 측면을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풀어낸 아티클은 두 편이 실려 있다.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카테고리, 그리고 디자인과 철학의 연관성에 관한 글들이다. 첫번째로, 기술, 미학, 사회학, 행동심리학 등 여러 분야와 연결되어 있는 디자인에서 두 가지 이상의 관점을 포괄하는 도서는 과연 어느 섹션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둘로 나뉜 하나의 영역: 분류를 통해 나타나는 디자인에 관한 존재론적 시각’(One Domain Divided in Twain: Ontological Perspectives of Design Expressed via Classification)에서 저자 레이첼 클라크와 캐서린 스탠튼은 19세기 중-후반 주로 미국에서 시작된 도서관 분류 체계를 그대로 따르는 현실을 지적하고, 그로 인해 디자인에 대한 시각과 접근에서부터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 분류법에 관한 이야기는 대학이나 정부 부처에서 디자인을 어디에 위치시키는지에 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미대생, 공대생이라는 간단한 일상적 표현, 그 카테고리화 된 인식 저변에 관한 이야기다.
두번째는 ‘연구에 있어서 디자인 수행/실천에 대한 자기정당화적 내러티브: 듀이, 비트켄슈타인, 하이데거 간 인식론적 교차점’(Scoping a Justificatory Narrative for Design Practice in Research: Some Epistemological Intersections in Dewey, Wittgenstein, and Heidegger)이다. 각각 무게감이 상당한 철학자들의 이름도 부담인데다 제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이 글에 대해 저자는 ‘디자인 연구에 적합한 특정 주제를 다루는 것,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다고 판단되는 [철학적 논의에서], 어떤 연결 고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라는, 여전히 복잡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글의 가장 큰 줄기는 이 세 철학자들 사이의 교차점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디자인 연구에 어떠한 적합성을 가지는지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이다. 저자는 디자인 연구에서 이따금씩 일부 철학적 개념이 소환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디자인 흐름 속에서, 어떤 철학적 시각으로 집중이 된다거나 혹은 시야가 넓혀지는지에 대한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찬찬히 설명해간다. 저자의 체계적이고 겸허한 말하기 방식이 독자들의 접근을 친절하게 도와준다.
몇 십 년이 지나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디자인 전문회사들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심이 가던 차에 ‘디자인 회사(1) – 디자인회사 이론’(The Design of Firms: Part 1 – Theory of the Firm)이라는 제목은 사실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여기에서 저자들은 디자이너들만의 전문회사보다 디자인 중심적 전문기업design-intensive firms에 초점을 맞추고, 전문회사firm에 대한 상세한 개념과 특성을 디자인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기업 경영의 어느 단계에서 디자인이 영향을 미치는지, 또 그것을 제대로 파악해야 조직 구조에서 디자인을 적합하게 배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문회사의 의미가 조사, 협상, 자원/소재 코디네이션, 지식공유, 제작/구매까지의 결정을 총체적이라고 하는 조직이라는 정의에 기반해서 볼 때, 놀랍게도 이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디자인이 전문회사의 존재를 만들고 유지시킨다는 – 전문회사가 곧 디자인의 결과물이라는 –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주제를 디자인 연구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여기에서 나아가 경영학에서도 이런 내용을 공유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체계화된다면 더 없이 이상적일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 외에 묵직한 심포지엄 리뷰가 두 편 실려 있다. ‘2019 변화를 위한 디자인 연구 심포지엄 리뷰’(Design Research for Change 2019 Symposium (DR4C), 2019, 런던디자인뮤지엄)와 지난 가을에 열린 심포지엄 리뷰 ‘뮤지엄 전시디자인: 역사와 미래’(Museum Exhibition Design: Histories and Futures, 2020. 9, 브라이튼 대학교)는 각각 20편, 58편의 발표문에 대해 포괄적으로 리뷰하고 있다. 특히 두 번째 리뷰자는 전시 디자인, 큐레이팅, 디자인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과 위치에 대한 거대한 심포지엄의 논의를 압축적으로 정리해준다. 무엇보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 운동과 같은 사회적 이슈와 디자인 전시의 관계가 다루어지면서, 미술관 운영에 초점을 두었던 기존의 논의에서 관심 주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이번 <디자인 이슈>는 지속가능성에 관한 구조적 논리를 통찰력 있게 조명해 온 토니 프라이Tony Fry의 저서 『반-미래화: 새로운 디자인 철학』(Defuturing: A New Design Philosophy, 2020; 초판 1999)에 대한 북리뷰로 마무리되고 있다. 리뷰에 대한 리뷰가 기이하기도 하고 혹시 잘못된 정보가 전해질 우려도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토니 프라이의 견해에 공감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저서의 리뷰자D. 우드의 견해를 통해 토니 프라이의 책과 그의 디자인 철학적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1999년 이 책이 『새로운 디자인 철학: 반미래』 (A New Design Philosophy: An Introduction to Defuturing)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을 때 <디자인 이슈>(2001 여름)에서 이 책을 리뷰한 크리스 셔윈(Chris Sherwin)은 토니 프라이가 지속가능한 혁신을 ‘그린, 공정, 번영’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며 환경에 대한 저자의 긴급한 경고를 전적으로 끌어안은 바 있다. 20년 이후 다시 선보인 이 책의 리뷰자 D. 우드는, 토니 프라이가 초판 출간 이후 20년간 일어났던 중대한 사회적 이슈들(소셜미디어, 코로나19, 인류세 등)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지만 환경-기후 문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그 어느 때보다 현재 유효하다고 강조한다.
저자 토니 프라이는 정부나 기업에 대한 비판보다 인간중심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현재 생태주의자들의 논의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그러나 디자인의 자본화(도시, 건축물, 제품, 소프트웨어 디자인, 특히 미국의 기술중심주의와 대량생산소비 문화)를 문제의 핵심으로 놓고, 다시 디자인을 통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하이픈이 중요)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의를 전개하는 점에서 주류 에콜로지 이론가들과 조금은 차별화된다. 2021년 지구종말시계가 100초 전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모든 현대 사회의 대규모 생산-소비 시스템을 멈추는 방법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긴급함을 일깨운다. 한편 토니 프라이는 급진적 행동주의나 허무주의와 거리를 두고, 디자인이 반지속가능성에서 선회하여 지속성sustainments의 생산 도구가 되는 데서 구원의 희망을 찾는다. 이렇게 보면 이 둘은 상당히 다른 입장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프라이가 ‘첨단 기술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이룰 수 있다’는 일반적인 디자인 접근의 허점을 짚어내는 것을 보면 생태주의자들과 같은 곳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공정거래를 통해 수급한 소재를 사용하거나 전자폐기물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소재를 달리 한 스마트폰을 제작하는 것보다 스마트폰 자체가 필요한지, 통신 시스템에 내재하는 감시, 신분 도난, 사생활 침해 문제 등을 고려하여 기술 발전 단계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 토니 프라이가 주목하는 지점이다. AI를 활용한 혁신적인 음식물 쓰레기 절감 장치에 대해 그는 이것이 일정 정도 줄어든 음식물 쓰레기 시스템을 ‘지속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먹거리 생산-소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이 이루어내는 일정 정도의 지속성에 안도하고, 삶의 방식이 거의 전적으로 기술에 의존한 상태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복합적으로 연관된 환경 이슈를 재고하는 두뇌가 마비될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친환경주의 디자이너이자 초판의 리뷰자인 크리스 셔윈은 ‘지속가능성은 비누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비누를 사용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버전의 리뷰자 D. 우드는 ‘지속가능성은 몸과 청결에 관한 윤리, 그리고 비누의 필요성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논박하며 토니 프라이의 논점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글로벌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 경계에서 서성일 뿐이다. 누구보다 디자이너가 비누의 필요성과 생태 윤리부터 고민을 시작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만 남긴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을 인지할 때에만 진실 그리고 그 곳으로 다가가는 실천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토니 프라이와 같은 이들의 목소리는 맥없이 수렁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마지막 지지대처럼 여겨진다.
Prince
Design Issues, Spring 2021, Volume 37, Issue 2
서문
Introduction
Bruce Brown, Richard Buchanan, Carl DiSalvo, Dennis Doordan, Kipum Lee
실체적(친밀한) 케어: 의료수행자와 환자 간 변화하는 관계를 물질화하는 도구로서의 디자인
Tangible Care: Design as a Vehicle for Materializing Shifting Relationships between Clinicians and Patients
Kathrina Dankl, Canan Akoglu
생물학적 연구를 위한 디자인
Design for Biological Research: Upjohn, Will Burtin, and the Cell
Diana Cristóbal Olave
쪼개진 스크린: 지역 멀티플레이어 디자인을 통해 본 비디오게임의 역사
Split-Screen: Videogame History Through Local Multiplayer Design
Veli-Matti Karhulahti, Pawel Grabarczyk
둘로 나뉜 하나의 영역: 분류를 통해 나타나는 디자인에 관한 존재론적 시각
One Domain Divided in Twain: Ontological Perspectives of Design Expressed via Classification
Rachel Ivy Clarke, Katerina Lynn Stanton
디자인 회사1 – 디자인회사 이론
The Design of Firms: Part 1 – Theory of the Firm
Andy Dong, Maaike Kleinsmann, Dirk Snelders
연구에 있어서 디자인 수행/실천에 대한 자기정당화적 내러티브: 듀이, 비트켄슈타인, 하이데거 간 인식론적 교차점
Scoping a Justificatory Narrative for Design Practice in Research: Some Epistemological Intersections in Dewey, Wittgenstein, and Heidegger
Brian Dixon
2019 변화를 위한 디자인 연구 심포지엄 리뷰 (2019, 런던디자인뮤지엄)
Design Research for Change 2019 Symposium (DR4C)
Nick Bell
뮤지엄 전시디자인: 역사와 미래 (심포지엄 리뷰) (2020. 9, 브라이튼 대학교)
Museum Exhibition Design: Histories and Futures
Enya Moore
토니 프라이, 『반-미래화: 새로운 디자인 철학』 (2020; 초판 제목 A New Design Philosophy: An Introduction to Defuturing,1999)
Defuturing: A New Design Philosophy
D 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