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9 | 안전한 맥주잔 디자인

Editor’s Comment

범죄라는 심상치 않은 문제를 다루는 디자인이 있습니다. 범죄에 맞서는 디자인(design against crime)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되는 실천들입니다. 어떤 디자인은 범죄의 예방에, 또 어떤 디자인은 범죄의 여파의 축소에 무게를 두기도 합니다. 2010년 오늘의 소식은 후자에 가까운 사례인데요. 음주와 폭력의 불행한 조합 속에서 위험천만한 흉기가 되곤 하는 맥주잔을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입니다.

범죄에 맞서는 디자인. 2007년 영국 내무부는 ‘범죄에 맞서는 디자인·기술 연합’을 조직하여, 범죄라는 사회적 현안에 디자인의 개입 여지를 모색해왔다. ‘안전한 휴대폰 디자인 공모전’과 같은 사례에서 보듯, 제품이나 기술 개발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범죄 예방을 고려하는 것이 목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 디자인 카운슬과 범죄에 맞서는 디자인·기술 연합은 ‘디자인 아웃 크라임(Design Out Crime)’이라는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 아웃 크라임이 거둔 최근의 성과는 다름 아닌 ‘안전한 맥주잔’ 디자인이다. 음주 관련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온 영국에서, 안전한 맥주잔이란 그저 이색적인 디자인 연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영국에서 음주 관련 범죄는 1997년 이래 감소 추세에 있지만, 여전히 음주 관련 사고는 연간 973,000여 건에 달하며, 특히나 술병, 술잔과 관련된 상해 건수는 87,000여 건이나 된다. 이러한 사고는 각종 사회비용들을 유발하는 바, 가령 영국 국가의료서비스(NHS)는 음주 관련 사고 및 상해 치료에 매년 27억 파운드 가량의 비용을 투입해왔다. 그러니 영국 사회에서 ‘안전한 맥주잔 디자인’이란 확실히 의미 있는 시도다.

디자인 아웃 크라임은 보다 안전한 파인트 잔의 개발에 나섰고, 그 결과 두 개의 프로토타입이 공개되었다. 디자인 아웃 크라임이 선택한 것은 여전히 유리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플라스틱 소재를 택할 수도 있지만, 플라스틱 잔에 대한 거부감은 강력하다. 주류 회사나 펍 운영주, 음주가 모두 여전히 유리잔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디자인 아웃 크라임은 그래서 보다 안전한 ‘유리잔’ 개발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를 위해 글래스웨어 업계 및 소재 전문가들과 함께 최신 유리 기술을 연구했다. 

‘트윈 월(Twin Wall)’과 ‘글래스 플러스(Glass Plus)’ – 렌더링 이미지 

먼저 ‘트윈 월’은 두 개의 초박형 유리 층을 레진으로 접착한 유리잔 디자인이다. 자동차 전면 유리창과 유사한 원리로서 유리를 깨뜨리기도 어려울뿐더러, 만일 잔이 박살 나더라도 유리 조각들이 튀지 않는다. 두 번째 프로토타입 ‘글래스 플러스(Glass Plus)’는 일반 파인트 잔처럼 생긴 유리잔이다. 하지만 컵 내부에 투명 바이오레진을 코팅하여, 잔을 훨씬 튼튼하게 만들었다. ‘트윈 월’과 마찬가지로 컵이 부서지더라도 코팅 막이 유리조각들을 붙잡아두어 안전하다. 

‘글래스 플러스’는 컵 내부에 바이오레진을 코팅한다. ‘트윈 월’은 두 개의 유리층 사이에 레진 막을 두었다. 

안전한 파인트잔 개발을 위해 디자인 아웃 크라임은 디자인 컨설팅 회사 디자인 브리지(Design Bridge)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RCA의 비즈니스 네트워크인 이노베이션 RCA에서 내놓은 초기 연구 결과를 검토하여, 맥주잔의 초기 콘셉트 개발을 진행했다. 더불어 이렇게 도출된 디자인은 유리용품 제조업계, 소재 전문가, 주류기업, 펍 업주들의 평가 과정을 거쳐, 두 개의 최종 솔루션으로 귀착되었다. “새 유리잔의 미덕은 영국이 파인트 잔을 사랑하는 이유들을 고스란히 지켰다는 데 있다. 여전히 보기에도 좋고 마시기에도 편하며, 게다가 안전하다.” 디자인 브리지의 설명이다.  

내무부 장관 앨런 존슨은 이번 프로젝트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대를 밝혔다. “유리로 인한 상해 사고는 끔찍한 상처를 낳고, 그 상흔은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오래도록 큰 짐을 지운다. 새 유리잔 디자인으로 유리로 인한 상해 사고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리잔 디자인이 폭력 예방의 유일한 해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디자인이 플라스틱 잔보다 나은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개발된 유리잔 프로토타입은 현재 심화 안전성 테스트 단계에 있다. 실제 펍과 클럽 환경에서의 테스트를 위해, 디자인 카운슬은 대형 펍 체인들과 새 유리잔의 시범 사용을 타진 중이며, 향후 12개월 안에 테스트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www.designoutcrime.org.uk

ⓒ designflux.co.kr

기사/글에 대한 소감과 의견을 들려주세요.

More

최초의 재활용 플라스틱 의자 30주년 기념 전시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엠마 스컬리 갤러리(Emma Scully Gallery)에서 사상 최초로 가구 디자인 재활용 플라스틱을...

템즈 글라스: 바이오 유리 개발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미래 소재를 연구하는 룰루 해리슨(Lulu Harrison)이 건축 스튜디오 뷰로 드 샹제(Bureau...

2008-06-11 | AMD 오픈 아키텍처 챌린지 수상작

인도적 위기에 대한 건축의 응답. 아키텍처 포 휴머니티의 활동은 그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99년 설립 이래 아키텍처 포 휴머니티의 2000년대는 여러 모로 분주했습니다. 전쟁, 재해, 질병 등 건축적 개입이 절실한 지역 공동체와 사회적 디자인을 고민하는 디자이너, 건축가를 연계하는 플랫폼으로서, 세계 곳곳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오픈소스 건축 네트워크를 여는가 하면 국제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하였지요. 인덱스 어워드, TED 프라이즈 등 수상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디로도 연결되지 않는 오늘 뉴스의 하이퍼링크들이 암시하듯, 아키텍처 포 휴머니티는 2015년 파산을 신청하며 15년 활동의 막을 내렸습니다.

요리를 위한 주방: 밀라노 디자인 위크 2022

베를린과 비엔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크마라.로진케(Chmara.Rosinke)가 2022년 6월 6일부터 12일까지 열린 ‘밀라노 디자인...

Designflux 2.0에 글을 쓰려면?

Designflux 2.0는 여러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에세이, 리뷰, 뉴스 편집에 참여를 원하시면 아래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