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시리아 시민 전쟁 후부터 현재까지 자국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진 난민은 현재 700만 명 가까이 된다. 2012년 이후 한국으로 시리아 난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2018년 기준 1천 200명 국내 거주) ‘난민’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논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어제, 미국 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 피란민들의 수용지로 평택 미군 기지를 거론하면서, 난민과 이들의 거주지는 점점 더 전 세계가 함께 안아야 할 사안이 되었다.
국내로 들어온 시리아인들은 현재까지 여전히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인도적 체류 지위를 얻어 생활하고 있고, 아프간인들의 경우는 아직 수용 여부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렇게 법률적, 행정상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축디자인과 난민 교육에 관한 논의는 시기상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은 채 어느새 이민 사회가 되어 버렸듯, 난민과의 공존, 이들과의 ‘생활’은 바로 내일로 나가온 현실의 문제로 접근하는 게 맞지 않을까.
대부분의 해외 연구서들은 ‘그들’의 것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우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을 선별하고 해석하는 과정은 문화 연구에서 필수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건축: 보는 방식, 학습 방식> (Architecture as a Way of Seeing and Learning)은 ‘난민’, ‘구호’ 등의 개념과 아울러, 현재 건축디자인에서 요구되는 ‘상황적 지식’과 ‘시민(사용자/거주자) 참여’에 관해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논의하고 있어서, 난민 수용을 장기적인 공간 문화의 관점으로 접근하는데 도움을 준다.
바르셀로나 출신의 건축가인 저자 네레아 아모로스 엘로르두이(Nerea Amorós Elorduy)는 5,000명 이상의 난민들이 한 곳에서 3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캠프, 특히 동아프리카 지역에 위치한 66개의 장기 거주 캠프(총 인구 200만 명)를 중심으로 이들의 교육 환경 구축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이 캠프 중 일부는 1958년부터 세워졌다고 하니, 난민의 역사가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 국가들의 식민 후기 문제와 맞물려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구호 기관이나 난민 수용 국에서는 난민 캠프를 여전히 임시 거주지로 여겨, 장기화된 거주에 필요한 구축 환경 상의 인프라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장기화 된 거주지를 과연 임시 거주지, 교착 상태(limbo), 전환적 공간(transitional space), 비장소(non-place)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캠프를 ‘도시적인 것(the urban)’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후기 식민 공간을 지역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장기 난민 캠프를 ‘원형적 도시 공간(proto-urban space)’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접근은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city)’에 바탕을 두고, 브란 얀센(Bran Jansen)이 주장했던 ‘캠프의 도시성’과 ‘소박한 도시적 전환(modest urban turn)’ 개념에서 출발한다.
본격적인 연구에 앞서 저자는 영미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난민 지원 및 소위 제3세계를 위한 자선 구호 단체의 활동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구 사회의 규정에 맞춘 교육 설비만 제공하는 것은, 현지 교육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비효율적 구호 행위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가 특히 교육 시설에 방점을 두는 이유는, 학습 환경이 복합적인 문화적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얼마나 정교하게 디자인되느냐에 따라, 이것이 장기적으로 사용자/거주자/난민들에게 자유를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이들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균형적 권력 관계의 충돌 위험이 높은 난민 캠프에서, 잘못된 디자인 환경은 권력자들의 지배 도구로 사용되어 사용자/거주민/난민에게 박탈감을 불러 일으킬 위험이 더욱 높다.
이 연구에서는 두 가지 연구 방법론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저자는 도나 해러웨이가 주장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에 기초한 ‘상황적 연구’ 방식에서 출발한다. 2011년 르완다의 건축학교에서 재직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2015년부터 장기 거주 캠프의 조기아동개발(ECD, Early Childhood Development) 시설 건축에 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그가 아동 교육 시설에 집중한 이유는, 물리적으로 경험하는 공간과 사물(실내, 마당, 문, 가구 등)이 삶의 조건이 되는 메커니즘, 즉 구축 환경에 대한 인지와 정서가 바로 이 시기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둘째, 저자는 사용자/거주자인 난민 아동들이 직접 기획과 디자인에 참여해야 하는 점을 강조하며 참여적 행동 연구(PAR, Participatory Action Research) 방식을 채택한다. 지금까지 난민은 ‘의존적 희생자’라는 의식이 만연해 있어서, 이들이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는 권한은 암묵적으로 배제되어왔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자금 지원이나 단기 봉사 형태로 도움을 주는 방식의 한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용자/거주민의 자립을 키우지 못하고, 도움을 주는 이들의 선행으로 끝나는 ‘자선(charity)’ 개념은 오래 전에 오염되었지만, 난민에 대해서는 과거의 방식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점을 지적하며, 난민이 직접 디자인을 제안하고 만들어가는, 난민 주도형 행동을 통한 구축 환경 조성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접근은, 최적화된 정책이나 기획은 결코 유니버설하지 않고, 부분적인 정보나 시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으며, 해당 상황의 여러 가지 요소들(난민 사회 내부의 다양성, 토지 문제, 토양의 질, 국경선과의 거리 등)을 고려하여 컨텍스트에 부합해야 한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힘의 관계를 인지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억압적 요소에 저항하는 실천적 행동을 학습하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사용자/거주민/난민, 지역 관계자, 건축가, 예술가, 교육 기관, 행정 기관이 모두 참여하는 하나의 ‘집합체’(assemblage)가 형성된다. 역으로 말해, 먼저 상호 소통에 기반한 집합체가 만들어져야만 협력적 참여가 가능하고, 실질적으로 적합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난민의 교육 환경 구축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공동체적 삶의 환경 조성에 적용되는 구축의 조건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난민 캠프의 환경 구성의 주체가 기술적인 구호 봉사자가 아니라 지역의 건축가와 장인, 난민으로 변화된 사례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집합체에서는 위로부터 구조화된 조직, 리더십, 이데올로기를 배제할 수 있어서, 난민과 수용 지역 공동체 모두 능동적으로 도시에 대한 권리를 이해하고 획득할 수 있다. 힘의 균형 속에서 장소를 만드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 어쩌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난민이 환경 구축에 참여하지 못하게 할 지도 모르겠다.
건축적인 측면에서 저자는 난민이 참여한 집합체에서 열대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만든 구축물을 통해, 형식적(formal) 또는 비형식적(informal)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난, 무형식(non-formal)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무형식은, 서구 중심의 근대화가 만들어 낸 형식의 기준을 벗어난 공간들(수치상 더 많이 존재하는)을 형식의 반대편에 놓인 비형식으로 여기지 않고, 각각의 상황에서 공간을 상상하는, 사고의 전환을 꾀하기 위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거주지는 건축물이라는 물질적 차원 상위에서 고려해야 할 생존의 환경이며, 이 환경에는 공동체 내외부의 관계와 거주자의 총체적 감수성이 반영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도시의 거주 공간은 언제나 윤리의 문제와 맞물려 있고, 난민의 공간은 더 많은 윤리적 잣대들이 충돌하는 곳이기에, 실천적 대안을 기획하기에 앞서 이 문제를 오늘부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현재 이 책의 E-book은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Pri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