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노트 : 큐레이터의 역사 연구

“배넘(Reyner Banham)은 내 연구에 두 가지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는 역사 연구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즉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대상을 선택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 대상에 가장 적절한 연구 방법을 찾는 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며, 그 방법에는 무한에 가까운 다양성이 있다는 인식이다.” 
– 후지타 하루히코, 『디자인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 역사 속의 현재』, p.196  

대부분 디자인을 공부하게 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디자인 역사는 교육적 목적으로 서술되는 디자이너론이다. 이후 조금 더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디자인사나 비평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산된 실증적 연구물들을 접하게 된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쁘다의 문제는 아니다. 누구를 위해 왜 쓰는지, 목적과 대상이 다를 뿐이다. 디자인사 연구가 독자층을 넓히고자 한다면 연구의 형식은 보다 다양해져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디자인 역사 연구의 주체가 바뀌면 디자인사 연구 방법도 달라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가치를 갖는가?’와 같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 물음을 갖고 있는 필자는 산업디자인과 디자인사를 공부한 뒤 미술관에서 큐레이팅을 하고 있다. 큐레이터는 오늘날 연구자들과 협업하면서 그들을 전시 안으로 매개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다보니 큐레이팅의 실천과 관련된 큐레토리얼 연구는 지식(사료)의 위치를 찾아내는 일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러한 지형학적 탐사는 늘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다. 그러나 ‘매개로서의’큐레이팅 자체는 역사 연구라 부를 수 없다는 평가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에 글로 서술되는 역사 연구 방식을 전시 기획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지는 늘 의문이다.

디자인사 연구 내부에서도 오랫동안 ‘새로움’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디자인 교육자이자 이론가인 윤여경은 “새로운 디자인 역사책을 써야겠다”는 글로 자신의 책에 서문을 열었고, 디자인 교육자이자 큐레이터인 김상규도 한국디자인사저널의 특별논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연구와 글쓰기”를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디자인사에 관한 담론은 대상에 대한 기록이나 관련 정보와 같은 사료의 부재로 인해 오랫동안 진전이 없었다. 이른바 자료에 대한 접근성 문제가 연구적 한계를 규정하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 디자인사 연구는 90년대 이후 문화사적 접근이 하나의 대안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조금씩 활로가 열렸다. 문화사적 연구는 문헌의 출처를 대신하여 개인의 삶을 미시사적으로 관찰하는 데서 역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로 인해 문화사 연구를 ‘순진하다’고 보는 시선이나 비판도 존재한다. 이것이 신뢰할만한 역사인가, 아니면 관찰자 개인의 주관적 경험일 뿐인가 하는 의심 때문이다. 관찰을 주관적이고, 감각적이며, 개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은 대부분의 자료를 과학적이고 행정적으로 목록화시키고, 서식화할 수 있게 된 현대 사회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 연구에서 관찰을 포용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나 과학적 근거를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늘날 관찰이란, 실천적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타자화를 지양하고 사회적 연대감을 표명하는 감정적 기표로서 역사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재역사화를 촉구하는 큐레토리얼 실천

전시 기획과 역사 연구는 길항적 관계에서 서로에게 의식적으로 개입해왔으나, 공간에 서술되어야 한다는 명시적인 조건으로 인해 주로 실물 기반의 아카이브 위주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저자(큐레이터)의 해석은 아카이브를 선택하거나 배제하는 방식 혹은 재배치하는 방법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시가 큐레이터, 참여작가, 관객 간의 협의가 이루어지는 ‘대화적 공간이자 담론 과정을 활성화하는 잠재성’을 품게 되면서, 인터뷰·텍스트·담론 분석, 인류학적 연구 등 다양한 학제적 방법론을 도입하고 있다. 

<저항하는 사물들>의 그래픽디자인은 영국 그래픽 디자이너 조나단 반브룩이 맡았다. 전시물의 DIY제작 매뉴얼은 전시장과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배포 또는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barnbrook.net

일례로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미술관에서 2014년 열린 전시 <저항하는 사물들(Disobedient Objects)>이 있다. 이 전시는 70년대부터 최근까지 특정 지역에서는 물론이고 초국가적으로 일어났던 여러 사회운동(social movement) 현장에서 보여진 물질문화를 다루고 있다. 특히, 제도권 안에 있는 미술관이나 미술사가 서술하지 않았던 사회운동에 주목했다.

전시의 주요 방법론은 ‘참여적 행동 연구(Participatory action research)’였다. 이 방법론은 인류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현장에서 직접 수행하는 연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전시는 지리적, 정치적, 제도적 상황으로 인해 완전한 참여적 행동 연구를 수행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참여’와 ‘관찰’이라는 실천은 이 전시를 만들어가기 위한 도그마(교리)처럼 전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전시기획과 연구의 주체는 미술관 큐레이터들만이 아니었다. 사회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관찰자면서 동시에 피관찰자가 되었고, 전시를 기획하고 구성해 나가는 큐레토리얼 실천에 함께 했다. 리서치 과정이 가능한 참여자 모두에게 공유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내용을 스스로 구성하고 조정하는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정보에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기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사회운동가들 대부분이 자신들이 고안해낸 여러 가지 즉석 제작물들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사물들이 예술사나 디자인사 맥락에 억지로 짜 맞춰져서 본래의 의도가 왜곡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에 담당 큐레이터들은 이들이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시도 자체가 기관 비평이 될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이로써 어떤 사물이 박물관에 소개되는가는, 어떤 것이 역사에 서술되고 다른 것은 그렇지 못한지 그리고 결국 무엇이 제도 안에 인정을 받는가에 관한 질문과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구글 폼 작성 같은 역사 서술

미술평론가 이기원은 지난 <W쇼: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2017) 전시 리뷰에서 디자이너의 목록이라는 전시방식을 두고 ‘돌에 새긴 기념비가 아니라 구글 폼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구글 폼은 구성원들 누구나 양식에 새로운 텍스트, 이미지, 동영상을 추가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 앞서 V&A 전시기획에 사회운동가들이 참여했던 사례는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에 구글 폼이라는 디지털 양식서를 활용하라는, 그런 말이 아니다. ‘상호적 참여’와 ‘상관적 관찰’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비단 큐레이터 뿐 아니라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실천에 활용해볼 수 있는 연구 방법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동시대 역사 연구와 큐레이터의 실천 사이에 공통점을 언급하겠다. 하나는 사회와 연결되려고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는 무엇인가’보다는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과 관련이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복잡하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비가시화 되거나 규명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적 연대감을 바탕으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실천적 측면에서 이제껏 목록화되지 못한 것에 질문을 던지며 불연속적인 시간과 장소를 해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두 가지 공통점 모두는 ‘참여’와 ‘관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글은 한국디자인사학회(2021)에서 발표한 내용 중 일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더 넓은 독서를 위해 추천합니다

로만 무라도프 저, 정영은 역, 『실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고양이처럼-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괜찮은 이유』 (미래의 창, 2018) 

이 책은 캘리포니아 아트 칼리지 교수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미학을 탐구한 책이다. 특히 “분명한 건 가끔 멈춰 서서 인내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며 스스로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고양이처럼 자유롭고 영감에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세상을 관찰하는 자신이 대상과 함께 하는 행위자, 즉 상관적 관찰자임을 상기시켜준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해야 하는 디자이너에게 집사를 둔 고양이처럼 굴라는 것은 꽤나 도전적인 말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하는 것은 디자이너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손주영 Jooyoung Sohn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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