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각은 ‘상황지어진(situated)’ 혹은 ‘체화된(embodied)’ 환경과 도구에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가 독립되거나 분절된 것이 아닌 환경과 떨어질 수 없는 지속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디자이너는 두뇌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함께 생각한다.
1980년대 이전 인지과학은 인간의 생각을 마치 컴퓨터와 같은 계산 과정으로 가정하고 입력과 부호화, 저장, 출력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경향을 인지주의로 부르며 인지주의적 연구는 마음, 지식, 사고, 추론, 문제해결 등의 지적인 정신 과정을 규명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인지과학은 마음의 인지적 측면 외에 정서, 신체, 환경, 도구의 측면으로 그 관심을 넓혀왔다. 그러한 확장된 입장을 상황지어진(situated), 체화된(embodied), 분산된(distributed) 마음 이론 등으로 부른다.
올해 <디자인 스터디즈>에 실린 연구 중 샤오 꺼(Xiao Ge), 래리 라이퍼(Larry Leifer) 그리고 린린 슈이(Linlin Shui)의 협업적 디자인에서 상황지어진 감정과 그 건설적 역할 – 경력 디자이너에 대한 혼합 연구(Situated emotion and its constructive role in collaborative design: A mixed-method study of experienced designers)와 벤 매튜스 외 5인(Ben Matthew, et al.)의 노트를 사용하는 방법: 스티키 노트의 체화된 사회-물질적 수행성(How to do things with notes: The embodied socio-material performativity of sticky notes)은 디자이너의 사고와 그 주어진 환경과 도구의 상호작용에 주목한 연구들이다.
먼저, 샤오 꺼 외 2인의 연구는 디자인 과정에서 디자이너의 감정이 디자인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 연구를 통해 밝히고자 했다. 벤 매튜스 외 5인의 연구는 디자이너의 협업 과정에서 스티키 노트(sticky notes)라는 물질적 도구가 어떻게 디자이너들의 대화와 몸짓을 사회적으로 매개하는지 분석했다.
샤오 꺼 외 2인의 연구는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느끼는 기계’라고 주장한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말을 빌려, 디자이너의 감정이 디자인의 인식에 변화를 주거나 혹은 인식의 변화는 감정으로 드러날 것으로 가정한다. 디자이너에게 감정은 항시 존재하며, 심지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과거 연구들은 좋은 디자이너들이 감정적 방해물을 잘 극복하며, 어떤 때는 정서적 어려움이 창의적 도전에 활기를 부여한다고 보고한다. 디자이너들은 기존 제품에 불만족스러운 감정을 갖는 데서 디자인을 시작할 수 있고, 의뢰인에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관철하기 위해 강렬한 감정을 품는다.
이 연구에서 상황적 감정(situated emotion)이란 주체의 인지, 지능, 행동이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맥락에 대해 느끼는 정서적 감정적 관여를 의미한다. 개인의 사고는 두뇌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물리적 맥락에 분산(distributed)되어 있다. 따라서 디자이너의 사회-물리적 맥락은 디자이너의 감정을 만들고 조정하며 더 나은 인지적 활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감정(e-mot-ion)은 그 어휘에도 드러나듯 감정은 움직인다. 감정에 대한 연구가 난해한 지점은 감정 측정의 방법에 있다. 이 연구는 경험적인 측면으로 회고적 자기 보고, 생리적 측면으로 발화 운율에 대한 피부전기적 활동(electrodermal activity, EDA), 행동적 측면으로 영상과 의미 분석의 세 가지 측면을 동원하고, 그 외에도 피부 전도도의 빈도, 음성 강도, 목소리의 강도, 웃음의 패턴, 그리고 감정 어휘에 대한 분석을 하는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다.
이 연구의 실험으로 현업 디자인 실무의 경험을 가진 2명의 디자이너 씩 다섯 쌍에게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의 식사 경험을 개선하는 과업을 주문했다. 실험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일정한 실험실에서 미리 제공된 자료들과 실제 사용자 테스트를 통해 과업을 수행했고, 그 결과로서 식사 전 가족을 연결할 수 있는 명상 제품, 특정한 음식을 먹기 위한 식기 세트, 아이들이 요리 과정에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믹싱볼 혹은 오븐 등을 최종 디자인으로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감정이 도르스트(Dorst)와 쇤(Schön)이 언급한 디자인 문제에 대해 디자이너가 가진 특정한 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지 조사했다. 이 연구는 외부에서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자극과 이 연구에서 얻은 감정적 신호에서 제시된 강렬한 감정적 참여와 디자인 프레임 사이에는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하였다.
결론적으로, 디자이너가 음성 강도를 높일 때, 새로운 단어의 사용이 증가했고 저자들은 이를 증거삼아 이 결과가 디자이너의 감정이 기존에 인식하지 못한 예기치 않은 자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것은 다마지오가 주장한 바대로 감정이 인지를 돕고 인지가 없이도 감정이 행동을 중재한다는 것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관점이 지금까지 무시되거나 절제되어 온 디자이너의 ‘직감(gut feelings)’이 까다로운 문제들을 ‘멋들어지게’ 해결하도록 이끄는 것을 설명해 낼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감정은 더 이상 불필요한 부산물이 아니며, 감정은 디자이너의 자기 인식을 높이는 과정이자 디자인 문제를 재인식(reframing)하는 일종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에서 조사한 모든 자료들이 잘 정돈되거나 일치된 데이터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어 보인다. 연구는 감정은 그만큼 변동이 심하고 개인에 따라 처해진 상황에 따른 변화는 매우 다를 수 있으며 그만큼 감정과 관련한 연구가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스티키 노트’는 쉽게 들러붙고 네모나며 다채로운 색상을 가진 찢고 접을 수 있으며 덧붙일 수 있는 물리적 어포던스(affordance)를 가진다. 그러한 장점 때문에 한동안 스티키 노트는 협업과 창의적 활동의 필수적 도구로 자리매김해 왔다. 기존의 스티키 노트에 대한 연구들은 스티키 노트의 물리적 장점을 디자인 과정의 인지적 역할을 중심으로 설명해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벤 매튜스 외 5인의 연구는 스티키 노트의 디자인 실행과 행위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회적 행위의 의미에 관심을 갖는다. 저자들은 스티키 노트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사회-물질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서 구성되는 역할에 주목한다.
이 연구는 디자인 협업 과정에서 스티키 노트의 역할이 그 물리적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물질에 의해서 체화된 – 실제적 디자인 현장의 분위기, 디자이너간의 미묘한 공기들, 언어와 비언어적인 몸짓들과 같은 사회적인 몸짓에 의한 것이며, 스티키 노트는 디자인 현장에서 수행적(performative)이면서 표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디자인 과정에서 스티키 노트는 디자이너들의 행동과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디자이너 협업의 사회적 소통을 중재하고 조정한다. 따라서 협업 회의에서 스티키 노트는 창의성을 담보하는 만능 툴이 아니며, 디자이너 협업의 사회-물질적 구성으로서 용도를 가진다.
이 작고 알록달록한 도구의 사회-물질적 맥락을 분석하기 위해 이 연구는 12주간 7명의 디자이너 팀의 스티키 노트를 활용한 디자인 활동에 대한 총 13시간 분량의 3개의 영상 자료에 나타난 디자이너의 행위와 대화를 민속방법론(ethnomethodology)에 따라 분석했다.
연구를 위한 자료로서 디자인 활동은 발표자가 화이트보드 앞에서 스티키 노트를 붙이는 상황과 아래 그림과 같이 넓은 책상 위에서 스티키 노트를 손에 들고 토의하는 상황이 사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줌(Zoom) 온라인 회의에서 디지털 메모의 친화도를 다이어그램을 작성하는 활동이었다.
저자들이 이 활동에서 주목한 것들은 디자이너들이 스티키 노트를 배치하는 것에 대한 망설임, 스티키 노트를 조정하고 재배열하는 손짓과 몸짓들, 스티키 노트를 임시적으로 유예하거나, 전체를 해체하고 재배치하는 상황에서의 대화를 분석한다. 이 과정의 체화된(embodied) 몸짓(gesture)들은 디자이너 간의 의견을 주고 받고 감탄하거나 동의하는 등의 언어적 표현들과 결합되어 사회적 의미들을 만들어낸다.
이 연구의 디자인 협업 도구에 대한 참신한 관점을 제공한다. 스티키 노트는 그 물리적 특성으로 창의적 사고 도구로 널리 쓰여 왔지만, 스티키 노트는 디자인 행위, 몸짓, 발언을 연결하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체화된 결과이다. 사물은 인간과 상황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창발(emergence)하는 실체이다. 스티키 노트의 물질적 성질은 디자이너의 사회적 행동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올해에만 ‘스티키 노트’에 관한 3편의 연구들이 더 실렸다. 이 연구들은 대체로 협업 과정에서 스티키 노트의 인지 과정에 대한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들이다. 보 T. 크리스텐센과 실리 줄리 J. 아빌고드(Bo T. Christensen & Sille Julie J. Abildgaard)의 스티키 노트를 활용하는 디자인 행위에서 ‘움직임’의 종류들(Kinds of ‘moving’ in designing with sticky notes), 옥사나 라코바와 올가 페도렌코(Oxana Rakova & Olga Fedorenko)의 한국 기업 위계에 대응하는 스티키 노트 – 현장 협업과 참여적 디자인에서 민족지학적 연구(Sticky notes against corporate hierarchies in South Korea: An ethnography of workplace collaboration and design co-creation), 그리고 린덴 볼 외 2인(Linden Ball, et al.)의 디자인 물질재의 하나로서 스티키 노트: 스티키 노트는 어떻게 디자인 인식과 협업을 지원하는가?(Sticky notes as a kind of design material: How sticky notes support design cognition and design collaboration)이 있다.
이번 두 편의 연구는 인지 중심의 디자인 연구에서 감정과 상황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는 하나의 발걸음인 듯하다. 흔히 감정은 판단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어쩌면 디자이너에게 감정은 판단의 주요한 역할을 해왔던 것은 아닐까? 무작정 감정을 내세울 수는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