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의 잇템 #3 뜨개질 : 취미로서의 노동

말레이시아 여행을 갔을 때였다. 한국 돈으로 5,000원도 하지 않는 금액의 진주 귀걸이를 발견했다. 아무리 말레이시아의 물가가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가격이면 공장에서 만들어진 모조품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진짜 진주냐고 물으니 격한 긍정의 끄덕임이 돌아왔다. 그 대답에 진주 귀걸이를 한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선, 이 진주 모양을 한 귀걸이의 빛깔을 통해서는 진짜 여부를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진주들의 크기가 아주 미세하게 다른 것이 보였다. 완벽한 원형이 아닐뿐더러 그마저도 크기가 조금씩 다른 진주의 모양은 결코 기계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엉성함을 발견한 순간 진주 귀걸이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졌다. 조개를 캐서 진주를 수확하고, 적절한 크기의 진주를 선별하고, 한 땀 한 땀 귀걸이 침을 붙인 사람들의 노력이. 그것은 감히 기계가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준 뜨개질 옷이 그랬다. 기계로 촘촘하게 짜인 옷들과는 무엇인가 달랐다. 실의 짜임이 균일하지 않았고, 어색한 매듭이 늘 있었으며, 새로운 실이 연결된 부위만 두툼하게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뜨개질 옷이 좋았다. 그것은 아마도 엄마가 그 옷을 만드는 과정이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어울릴 옷을 디자인하고, 적절한 색상의 실을 고르고, 한  땀 한 땀 실을 엮은 노력이. 그것은 감히 기계와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행위였다.

1995년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기
엄마가 짜준 뜨개질 옷은 그 시절 자랑거리였다.

90년대 뜨개질이 다시 유행했다. 당시 기사들은 ‘추억의 손뜨개질 부활’[1] 등의 제목으로 뜨개질의 재유행을 알렸다. 이 시기 가정을 이룬 주부들은 엄마가 만들어준 손뜨개 옷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세대였다. 하지만 이전 시대 손뜨개 옷은 90년대의 손뜨개 옷과는 성격이 달랐다. 6~70년대만 하더라도 뜨개질을 하는 행위는 절약과 검소한 살림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가 뒤따랐고, 때때로 뜨개질은 주부들의 부업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경제적 여유를 얻은 90년대 중산층 가정에서의 뜨개질은 이처럼 절약이나 검소한 살림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가 만들어준 뜨개질 옷과 같이 하나의 물건이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 방식이다. 효율을 미덕으로 삼은 자본주의는 분업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노동의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1936)>는 리틀 트램프(Little Tramp)라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변화한 노동 현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트램프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끊임없이 나사들을 죈다. 자비 없는 컨베이어 벨트는 몸이 가렵거나, 벌레가 위협하는 돌발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던 일을 지속해야 하는 인간 기계가 되지 않으면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영화 <모던 타임즈 (1936)>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분업은 근대 사회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는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이전 시기 노동 방식과는 확연한 차이를 가진다. 우선 분업은 나사를 죄는 사람은 나사만 죄고, 망치를 두드리는 사람은 망치만 두드리는 <모던 타임즈> 속 노동 현장처럼, 물건이 만들어지는 각각의 단계에서 분화된 업무를 하기 때문에 비교적 노동에 대한 훈련 기간이 짧다. 반면 물건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노동 방식은 오랜 훈련의 기간이 필요하다. 이 훈련의 기간이 끝나고 완성도 있는 물건이 생산될 때 우리는 그 물건의 생산자를 기술자 혹은 숙련노동자라고 부른다.

노동에 대한 목적 또한 다르다. 분업이 최대한의 효율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 목적을 둔 노동 방식이라면, 숙련노동자들의 노동 방식은 자신의 계발과 명예 등을 향상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들의 노동은 기능에 대한 지식과 기능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비자본주의적 동기에 의해 실행된다.[2]  뜨개질이라는 노동은 이 숙련노동자들의 노동 방식과 닮아있다. 이미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된 90년대 한국에서, 그것도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에 중산층 주부들은 시대를 역행하는 노동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산업혁명 이후 기계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조악하다고 느낀 윌리엄 모리스는 19세기 말 미술공예운동을 통해 수공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계 생산으로 많은 물건을 효율적으로 찍어낼 수 있었던 시기 윌리엄 모리스의 주장은 시대를 역행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100년이 훌쩍 지나 기계로 만든 물건들이 더는 조악하지 않을 때, 효율적인 생산과는 거리가 먼 뜨개질은 오히려 거대한 유행이 되어 돌아왔다.

뜨개질로 만든 물건들
뜨개질은 가방, 옷, 식탁보 등 다양한 물건들을 만드는 수단으로 쓰였다.

유행에는 다수가 공감하는 매력이 전제된다. 뜨개질이 유행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 주부들이  공감하는 매력이 뜨개질에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1991년 한 보일러 광고는 ‘생활 속의 여유를 갖는 것도 작은 행복 – 귀뚜라미는 바쁜 일손을 쉬게 해 드립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주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흔들의자는 자세를 고정하기 힘들어 빠른 시간 집중력 있게 처리해야하는 ‘일’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흔들의자는 주로 휴식을 목적으로 할 때 사용된다. 흔들의자에서의 뜨개질은 더 이상 절약이나 검소한 살림을 위한 노동이 아니다. 광고는 뜨개질이  생계의 수단을 벗어나, 여유와 휴식의 상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풍요로웠던 90년대, 뜨개질의 매력은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 비효율적 활동인 것에 있었다. 생계와는 무관한 활동이 되어버린 뜨개질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 것이다.

귀뚜라미 보일러 광고
행복이 가득한 집, 1991. 10월호

엄마는 그 시절 뜨개질은 무언가 우아한 느낌을 선사해주었다고 했다. 시간이 돈이 되는 사회에서 시간을 일이 아닌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 풍요로움이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효율의 시대에서 비효율을 추구하는 노동, 이윤 창출의 노동에서 취미로서의 노동은 생계의 반대편에 선 우아한 활동이 되기 충분했다. 뜨개질이 선사하는 여유로움은 90년대 엄마들의 사랑과 정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사랑과 정성이 담긴 취미로서의 노동, 그것은 기계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 ‘추억의 손뜨개질 부활’, 경향신문, 1997.01.14, 15면.

[2] 에릭 홉스봅, 정도영 역, 『자본의 시대』, 한길사, 2012, p427.

Designflux 2.0 Essay Series
중산층의 잇템 : 90년대 가정의 디자인문화⟫ 양유진

중산층의 시대. 그들의 집에 자리한 ‘필수 아이템’은 무엇이었는지, 그 물건들은 왜 ‘필수 아이템’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며 그 시절 디자인문화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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