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이 말을 한다면 #2 꽃과 함께 피어나 꽃과 함께 지게 된 내 첫 번째 생

운명의 트럭

못~쓰는 냉장~고, 티브~이, 컴퓨~터, 에어~컨 삽니다. 
공-일-공-팔-오-삼-팔-오-이….

아침마다 들었던 이 소리에 나의 운명이 결정될지 몰랐다.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각 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는 소리. 멀리서부터 반복되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서 우리 집 곁에서 가장 크게 들리다가 다시 점점 멀어졌다. 소리는 언제나 자동차가 굴러가는 소리를 타고 왔기에, 목소리도 차에서 나는 소리겠지…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대한 앵무새 같은 이 차, 정확히 말하면 트럭! 위에 내가 올라타다니, 이건 상상하지 못했다.

설거지를 하던 주인이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무장갑을 벗어 재끼고 급히 전화기를 찾았다. 소리를 놓칠까 잠시 조용히 바깥으로 귀를 기울이더니 입으로 숫자를 중얼거리면서 화면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네, 아저씨예. 지금 아저씨 지나가는 집 앞인데예. 김치 냉장고 팔 것 있거든예. 예예 알겠습니데이.”

코드가 빠진 채 현관 앞에 놓여있던 나는, 주인의 통화 내용을 듣는 순간 내 운명이 골목을 돌아다니던 소리와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다가오던 소리의 데시벨이 가장 높은 상태로 멈춰 섰다.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소리의 이동만 멈췄다. 함께 차 소리도 멈췄는데, 사이드브레이크 올리는 소리,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나더니 계단으로 성큼성큼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내 앞에서 핸드폰을 들고 서성이던 주인이 발소리를 듣고 현관문을 열었다. 

첫 번째 주인

나는 김치 냉장고다. 하늘을 향해 뚜껑을 휙 들어 올리면 내 안의 깊숙한 공간이 드러난다. 이건 땅 속에 항아리를 묻어 김치를 보관하던 옛 사람의 관습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구조다. 차가운 공기는 뜨거운 공기보다 무거워서 아래로 내려가는데, 냉장고 문을 열 때 찬 공기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위로 문이 열리는 과학적인 이유가 적용 됐다. 냉장고 벽 안에는 냉각 코일이 감겨있고 이를 직접 냉각 방식이라 하며, 땅속에 김치를 묻었을 때 오래도록 차게 유지되는 것처럼 이 방식으로 냉장고의 온도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유지되고, 물론 성에가 생기지만 성에 제거 버튼을 누르면 5분 안에 다 떨어지기에 큰 불편함이 없다. 게다가 이 냉장고는 류코노스톡시트리움이라는 김치 유산균이 아주 활발히 만들어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적용되어 김치 맛이 비교 불가 하다… 고 했다.   

이 모든 말은 나를 판매하던 사원의 말이다. 내가 있던 곳은 냉장고, 에어컨, tv 등 수십 대의 새 가전제품이 전시되어있는 반짝반짝한 판매장이었다. 난 그곳에 전시 되어 있었는데, 전시장에 오는 손님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읊던 사원의 말을 반복 청취 하다못해 외워버렸다. 그는 손님이 오면 김치냉장고에 대한 기본 원리와 기술적 성취, 최근 유행 스타일까지 쉬지 않고 빠르게 설명했다. 끊이지 않는 말이 제품 구입을 하게 만드는 주문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마른 행주로 내 위에 쌓인 먼지들을 대충 닦아내던 그의 손길에서 독립하게 된 날이 나의 주인을 만나게 된 날이다. 눈을 꿈뻑 떴다 감으며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냉장고 사이를 돌아다니던 아주머니에게 판매 사원이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내가 외워버린 그 말들을 반복 재생했는데 랩 같던 문장들을 듣던 아주머니는 타임을 요청하듯 몸을 약간 뒤로 젖히면서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좀… 싼 건 없으예?”

사원은 주인의 말을 듣고 새로운 기회를 포착한 듯 빠르게 몸을 돌려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 제품이 전시제품인데 이 제품을 구입하시면 판매가에서 10프로 할인이 된다, 사용하지 않고 전시만 되어 있어서 중고가 아니다, 쓰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약간의 기스가 있을 순 있지만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배송과 설치까지 완벽하게 해드린다, 만약 삼성, 국민, 농협카드로 결제를 하면 카드사 할인까지 받아서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며 숨도 쉬지 않고 설명했다. 잠시 쉰 후 마지막에는 “제가 자신 있게 강력 추천 하는 제품이에요.” 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야 이렇게 많은 김치를 쬐깐한 냉장고 하나에 다 늘라카니 억수로 힘들었다 아이가, 이제사 자리가 좀 나네.”
“그러니까, 남들 진작에 사서 쓰고 있는데 빨리 좀 사지. 공간 진짜 여유롭다.”
“야 그래도 옛날 니 어릴 때, 금성꺼, 문 두 개짜리 녹색 냉장고 기억나나? 우리 그거로 충분히 잘 먹고 잘 살았다.”
“에이 엄마, 그건 옛날이지. 우리 다 컸잖아. 얼마나 잘 먹고 많이 먹는데. 그나저나 김치는 진짜 맛있을라나?”

내 주인이 된 이 집의 엄마와 그의 딸은 내가 이 집으로 온 것을 아주 만족하는 눈치였다. 난 키 큰 양문형 냉장고 옆자리에 놓이게 되었고 이후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내 밑으로 동그란 반지가 굴러들어 왔을 때 잠시 내 자리를 이탈했던 기억이 있다.) 주인은 뚜껑 밑의 깊숙한 공간에 여러 종류의 김치를 넣었다. 배추김치, 총각김치, 열무김치, 파김치, 묵은지, 물김치, 갓김치…. 김장 김치는 가장 깊은 곳에 넓은 자리를 차지했고, 그 위에는 계절에 따라 다른 김치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남는 공간엔 야채나 고기, 반찬을 넣은 밀폐 용기가 요리 조리 착착 블럭처럼 빈 틈 없이 채워졌다. 

꽃무늬

집 안에는 나 이외에도 꽤 많은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물건들은 밖으로 나와 있어서 정돈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를테면 씽크대 위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밀폐 용기가 6~7개씩 탑을 쌓고 있거나 전기밥솥, 미니 오븐, 전기 포트 같은 소형 가전제품들이 여기 저기 놓여있고, 뒤집개, 국자, 집게, 가위 등 용도가 다른 조리도구들이 싱크대 앞 벽에 한가득 걸려있었다. 물건들은 수납장 안으로 들어가서 감춰지는 게 아니라 잘 보이는 곳, 꺼내서 쓰기에 가장 편한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주인은 하루의 2/3정도를 부엌에서 생활했다. 요리를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물론이고 커피 한 잔을 마시거나 핸드폰을 보며 쉴 때도 식탁에 앉아있었다. (그래서 난 주인의 모습을 항상 지켜보면서 살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를 정말 나의 ‘주인’이라고 여기게 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주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을 보면.) 그는 부엌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도구와 재료들로 수많은 냄새를 만들어내는 창조자였다. 보리차를 팔팔 끓이는 고소한 냄새나, 고기의 뼈를 물에 푹 고는 냄새, 코끝을 찌르는 쉰 김치 냄새, 쿰쿰한 청국장의 묵직한 냄새 따위가 바톤 터치 하며 릴레이 달리기처럼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편안해서 좋았다. 이곳에 내가 있어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너무 깔끔하지 않아서 새로운 나의 등장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같아 편했다. 청정한 공기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서 내 뚜껑을 열면 새어나오는 강렬한 김치 냄새가 아무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편안함의 제일가는 공여자는 바로 ‘꽃’이었다. 내 몸에는 하얀 바탕에 은은한 분홍빛 꽃이 그려져 있다. 반짝반짝하던 전시장에는 꽃이 그려진 제품들이 많았다. 판매 사원은 이 꽃이 몇 년간 유행의 선두이며, 명품 가전을 뜻하는 표시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집에도 꽃이 있었다. 그냥 있는 것을 넘어서 여기 저기 많이 있었다. 내가 마주보고 있는 벽에는 크고 강렬한 붉은 색 꽃이 있었고, 거실 벽면에는 연한 회색 빛깔로 잔잔하게 그려진 작은 꽃들이, 소파 위를 굴러다니는 쿠션에도 꽃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베란다를 가득 채운 화분에도 꽃이 피고 있었고, 현관 옆 화병에는 커다란 가짜 해바라기가 꽂혀 있었다. 

집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주인은 내 옷을 만들어주었다. 나의 뚜껑이 밋밋해보였을까? 노란색 꽃잎에 초록 잎사귀들이 붙어있는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천을 재봉틀 아래로 오가며 순식간에 옷을 만들어 내 위에 살포시 덮었다. 끝자락은 하얀 레이스로 마감이 되어있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옷을 들췄다 덮었다 해야 했지만 주인은 전혀 귀찮아하지 않았다. 찬 기운이 가득한 내 몸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온기였다. 물리적인 따뜻함만이 아니라 나를 아끼는 주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꽃은 낯선 곳으로 옮겨진 나에게 고향에 온 것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 내가 이 집에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아주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무늬 벽지

사라진 꽃

변함없는 날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동안 난 이 집에 없어서 안 될 존재로 자리를 잡았다. 내 안에는 언제나 김치와 음식이 가득했고 주인은 부엌을 떠나지 않고 나의 문을 열고 닫으며 성실하게 냄새를 만들어냈다. 집 안의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 정도 부엌으로 모여들었다. 대개 2명이나 3명이 모였는데 항상 동일한 사람들은 아니었고 서로 다른 사람으로 매번 교체되었다. 드물게 이 집에 사는 사람 다섯 명이 모두 모일 때가 있었다. 다섯이 모이는 날은 특별한 날이라 주인은 평소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이며 더 많은 음식들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주인의 손길로 먹었고 배를 불렸고, 편안하고 기분 좋은 쉼을 누렸다. 때로 서로의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목격했지만 그런 순간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간 속에 녹아버렸고 다시 함께 먹었다. 

어느 날, 밖에 나간 딸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엄마, 엄마! 왔어 왔다고. 문 앞에 와 있었네.”
“아 맞나, 그거 벌써 왔나. 아이고 할 수 있긋나?”
“나만 믿으라고, 엄마는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돼.”
“지금 할기가?”
“풀이 발라져있어서 바로 해야지, 마르기 전에.”

상자 안에는 차곡차곡 접혀서 비닐에 쌓인 촉촉한 종이가 있었다. 주걱처럼 생긴 주황색 도구도 있었고, 작은 비닐에 멀건 쌀죽 같은 것도 들어있었다. 둘은 벽 가까이 놓여있던 커다란 6인용 원목 식탁을 끙끙대며 내 쪽으로 밀었다. 벽 앞에 쌓여있던 물건들을 치우며 주변을 최대한 깨끗하게 정리했다. 바닥에는 신문지를 촘촘하게 깔았다. 식탁 의자를 벽 가까이 놓은 딸이 그 의자 위에 올라섰다. 

“엄마, 뜯을게.”

뜯는다니, 뭘 뜯는다는 거지? 그 말의 의미를 추측하기도 전에 보게 된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마주보던 벽에 그려진 붉은 색 꽃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다. 딸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아래서부터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붉은 꽃들 아래에 숨어 있던 회색 콘크리트 벽이 점점 드러났다. 딸은 벽에 꽃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작은 조각 하나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뜯어냈다.  

“생각보다 잘 뜯어지네? 벽도 울퉁불퉁 하지 않고 깨끗하다. 귀찮아서 초배지는 안 시켰는데 충분히 괜찮겠어.”

그 후 그는 비닐에 쌓인 종이를 꺼내 펼쳐서 들었다. 종이의 왼쪽 끝과 오른 쪽 끝을 양 손에 잡고 조심조심 벽으로 들고 갔다. 종이는 벽의 높이만큼 길어서 딸의 키를 훌쩍 넘었다. 집게 모양의 손가락으로 종이를 살짝 잡은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양껏 들었고, 그래도 바닥에 끌리는 아래쪽은 주인이 잡고 함께 움직였다. 마치 신부의 웨딩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따라가는 모습 같았다. 둘은 천천히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들고 있던 종이를 콘크리트 벽에 붙였다. 상자에 함께 들어있던 주황색 주걱 같은 도구를 한 손에 들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쭉 밀며 붙였다. 하나를 다 붙이고 또 다시 옆에 하나를, 그리고 또 하나를 더 붙였다. 벽에서 튀어나간 남은 종이는 칼로 잘라냈고, 종이에 가려져 불룩 튀어나온 전등 스위치 부분도 깔끔히 도려냈다. 회색 벽이 감쪽같이 종이에 덮였다. 종이로 덮인 벽은 꽃무늬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눈부시게 새하얀 벽이었다.   

“아 깨끗하다. 어때 깔끔하지? 엄마, 우리 조명도 다른 걸로 갈자, 이거 너무 촌스럽잖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흰 벽을 바라보던 딸은, 투명한 유리 막대 두 개가 달려있는 식탁 조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꽃무늬의 찢겨짐. 눈부시게 하얀 벽의 등장. 나를 둘러싼 물질세계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앞으로 닥칠 운명을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고 집안에 가득했던 꽃이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거실의 회색 빛 꽃무늬 벽도 같은 변화를 겪었고, 소파 위 꽃무늬가 그려진 쿠션은 뾰족뾰족한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무늬의 쿠션 커버로 교체되었다. 현관 옆의 해바라기 꽃은 창고로 들어가고, 그 자리에는 탁한 초록빛 잎사귀가 무성하게 붙어있는 가짜 유칼립투스가 꽂혔다.   

이 모든 변화의 주도권은 딸에게 있었다. 딸은 본인의 집 꾸미기 욕망을 내 주인의 집에서 해소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장 공들이는 곳은 자신의 방인 것 같았는데, 그 방은 나의 시야에서는 볼 수가 없어서 확인이 불가능했다. 처음엔 딸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던 주인도 하나씩 달라지는 집안의 풍경을 반기는 눈치였다. 그 무렵이었을까, 내 뚜껑을 열고 깊숙한 곳에 있는 김치통을 꺼낼 때마다 주인은 아이고오 허리야,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중고가전센터

시끄러운 트럭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교외의 큰 창고였다. 창고 입구 위에는 <스피드 중고>라는 큰 글씨의 간판이 붙어있었는데 아래에는 ‘직거래 가능, 완벽 a/s, 새 것 같은 중고’라는 문구가 있었다. 창고 안에는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김치냉장고 등 커다란 전자제품이 가득했고 벽 쪽으로 길게 세워진 철제 선반에는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 오븐 같은 상대적으로 작은 전자제품이 올려져있었다. 

반짝반짝한 전시장을 떠올렸다. 제품들은 다 비슷했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사람의 손을 탄 물건? 천정에 대충 매달아놓은 형광등? 지붕과 벽을 지탱하고 있는 갈색 에이치빔? 창고에 있던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수레에 실려 들어가던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는 알코올 냄새가 나는 약품과 물로 내 몸을 깨끗하게 닦았고, 닫혀있던 몸체를 공구로 열어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청소했다. 내부 부품의 성능을 체크하며 필요한 부분은 교체도 했다. 곁에는 분해되고 해체된 다른 냉장고의 조각들이 많았다. 마지막엔 작은 구멍에서 깜짝 놀랄만한 강한 바람이 나오는 호스로 모든 먼지를 날려 버렸다.

나름의 단장을 끝낸 나는 다른 김치냉장고들이 진열된 곳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건 진열이라기보다는 단순 집합이었다. 각각의 제품이 돋보이는 전시장의 배치가 아니라, 그냥 같은 종류끼리 뭉쳐놓는 느낌이었다. 이곳엔 냉장고 한 묶음, 저곳엔 세탁기 한 묶음, 선반엔 전자레인지 한 묶음, 내가 있는 곳은 김치냉장고 한 묶음.

주인의 집에서 꽃이 사라진 하얀 벽을 보며 지내던 어느 날, 딸이 새 김치냉장고를 덜컥 데리고 왔다. 김치냉장고라고 했는데 나와 다른 형태였다. 키 큰 냉장고와 높이가 같았고, 앞으로 여는 문이 있었고 그 아래엔 서랍이 있었다. 허리를 숙일 필요 없이 서랍만 열면 김치를 꺼낼 수 있었다. 게다가 냉장고는 꽃이 사라진 벽처럼 눈부시게 하얀 색이었다. 표면에는 어떤 무늬도 없었다. 새 김치냉장고를 두고 딸은 첫 월급 선물이라고, 엄마 허리가 걱정돼 사준 거라고 했다. 나는 바로 치워지지 않고 새로운 김치냉장고의 등장과 그 이후의 시간을 지켜봤다. 주인이 아직 잘 돌아가는 나를 처분하기 아깝다면서 김치냉장고 두 대를 다 쓰겠다고 우긴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자리는 옮겨졌다. 몇 년 동안 붙박이었던 내 자리를 새로운 김치냉장고에 내줬다. 난 거실도 부엌도 아닌 애매한 자리로 밀려났고 얼마간은 사용이 됐다. 그러다 점점 굳이 없어도 되는 애물단지가 되다가 결국 몇 개 없던 음식통이 정리되고 코드가 뽑혀 현관 옆에서 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트럭에 실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내 생애를 곁에 있던 김치 냉장고에게 털어놓았다. 그의 몸에는 나 같은 꽃무늬가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아주 진하고 강렬한 와인빛 컬러가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주인의 집에서 본 새하얀 벽과 너무 대조되는 색상에서 나와 비슷하게 흘러갔을 그의 운명을 감지했다. 유행의 최전선에서부터 철지난 스타일로의 전락. 그리 길지 않았던 이 변화의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흘러갔다. 아니, 우린 의지 따위는 가질 수없는 사물이었다. 저항과 혁명은 오직 사람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사람들의 생산의 속도와 낭비에 대한 소리 없는 불평이 이어졌다. 우리를 묶는 감정은 동질감이었다. 

또 다시 희망

창고 생활은 재밌는 측면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살다온 친구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식당에서의 생애, 신혼부부의 집에서의 생애, 공장에서 출고되지 못한 생애…. 내가 알 수 없었던 상황과 환경들이 너무 많았다. 웃음과 눈물 모두를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나누며 한순간 끝나버린 내 생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달랬다. 

그렇게 지내다 어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지난주에는 젊은 청년이 자취집에 놓을 10키로 통돌이 세탁기와 전자레인지를 구입해갔고, 그제는 어떤 아저씨가 어머니 집에 놓아드린다며 꽃무늬가 그려진 양문형 냉장고를 구입한 것이다. 어제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수다쟁이 아주머니가 음식점에 필요하다며 내 곁에 있던 와인색 김치 냉장고 친구를 덥석 구입했다. 

속사포 같은 설명은 아니었지만, 보시다시피 아주 깨끗하다, 부품도 다 갈았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1년은 a/s 해드린다는 창고 아저씨의 우직한 설명이 귀에 들어왔다. 분위기가 반짝반짝하진 않더라도 이곳은 누군가의 구매를 기다리는 엄연한 판매장이었다. 꽃무늬와 함께 저버린 나의 첫 번째 생을 비관했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나에게도 다시 올 두 번째 주인, 두 번째 생을 향한 희망을 슬며시 심어보고 싶었다.

Designflux 2.0 Essay Series 
사물이 말을 한다면⟫ 채혜진

사물의 일대기를 상상하는 일을 통해 우리의 일상 문화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것은 사물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다. 

채혜진은 디자인 연구자다. 건국대학교 디자인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디자인 문화와 디자인 역사다. 현재 한국 주거 공간과 여성을 중심으로 나타난 디자인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공저로 《생활의 디자인》, 《코리아 디자인 헤리티지 2010》, 《신혼집 인테리어의 모든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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