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인간 보편을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다양하고 특수한 민족지(知)를 구성함으로써 문명적 인간의 모순을 드러내고 성찰하는 학문이다(레비 스트로스). 따라서 인류학은 인간을 중심에 두면서도 인간 외적인 자연물, 동물, 식물, 사물, 환경과의 공통성과 차이를 번역하는 작업에 다름아니다. 최근 인류학의 화두를 발판으로 [디자인 스터디즈]에는 인류학과 디자인을 결합한 인류학적 디자인(anthropological design), 디자인 인류학(design anthropology)의 연구들이 실렸다.
디자인 스터디즈는 디자인 중심부의 이슈만을 골라 다루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중심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그간의 관심사는 ‘인지, 심리, 경영, 과학, 기술’ 등과 관련한 키워드가 중심어를 차지해 왔다. (디자인 스터디즈는 연구 키워드를 논문지가 정해둔 키워드 목록에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하나는 연구자가 정할 수 있다). 이것은 디자인 스터디즈의 관심사가 꽤 ‘폐쇄’적인 것을 말해준다. 만약 디자인 스터디즈에 투고하길 원한다면 이 리스트를 먼저 눈여겨 봐야 한다.)
그런데 올해 상반기 실린 연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일상적 디자인(everyday design), 탈식민지적 디자인(decolonising design), 인류학적 디자인(anthropological design) 등의 다소 의외의 단어가 눈에 띈다. 그 외에도 상황 지어진(situated), 이중과정(dual-process), 협업(collaborative), 큐레이션(curation), 설정(configuration) 등의 키워드가 변화와 다양한 지평으로의 이동을 느끼게 한다.
이번 리뷰의 주제인 ‘인류학’이 포함된 논문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문화기술지와 전시 디자인, 모에스고르 박물관 개관전에서 얻은 통찰들’(Ethnography and exhibition design: Insights from the Moesgaard inaugural), ‘협업적 뮤지엄 큐레이션의 디자인 인류학적 접근’ (Design anthropological approaches in collaborative museum curation), ‘취약성과 일상적 디자인의 섞어짜기: 소아암 병동의 수족관 주변에서의 조우’(Interweaving vulnerability and everyday design: Encounters around an aquarium in a paediatric oncology ward)의 연구들이 눈에 띈다.
디자인 연구의 성패는 실천과 이론의 연결에 달려 있으며, 그 연결은 ‘연구방법론’을 통해 가능하다. 어쩌면 디자인 연구는 통계와 양적 연구방법론에 매몰되어 방법론에 대한 상상의 부재에 시달려 왔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디자인의 실천은 인류학의 여러 방법, 개념들과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될 수 있을까? 이들 인류학적 디자인 연구들은 디자인의 새로운 실천적 연구 방법론을 위한 상상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한다.
‘문화기술지와 전시 디자인, 모에스고르 박물관 개관전에서 얻은 통찰들’은 톤 오토(Ton Otto)와 제니퍼 데거(Jennifer Deger), 그리고 조지 마커스(George Marcus) 세 사람의 담화 형식으로 이뤄진 연구로서, 덴마크 오르후스(Aarhus)에 위치한 모에스고르 박물관(Moesgaard Museum)의 개관전의 일부로 열린 ‘죽은 자들의 삶’(The Life of the Dead) 전시를 ‘사례 연구'(case study)의 형식으로 풀어놓고 있다. 연구는 해당 전시에 대한 전시기획자, 행정가, 이론가인 세 사람의 상호작용에 대한 실행적 경험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이 연구는 인류학적 디자인에 대한 몇 가지 인류학 개념을 제시한다. 마커스는 인류학자는 자고로 ‘누더기의 끄트머리’(rugged edges)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다가가기 위해 ‘풀린 실타래’(loosen thread)를 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며, 완전치 않은 너덜너덜하게 풀린 끄트머리들에 주의집중하는 것이 실제 이 전시의 참여자와의 상호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또 하나의 개념은 트렌스덕션(transduction)으로 ‘변환, 번역, 혹은 형질 도입’의 의미를 내포하는 이 단어는 전기학에서 음향을 전기신호로 바꾸는 형질적 변화의 개념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인류학적 디자인에서 트렌스덕션은 민족지 간의 형과 질을 변환하는 개념적 변환을 의미한다. 즉, 인류학과 디자인 앞에 놓인 헝클어진 문제들에 대해 디자이너는 자명한 어떤 ‘존재’ 아래 있는 조건을 드러낼 수 있는 난기류, 왜곡과 저항, 경청을 포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전시는 호주 북부의 아르헨 지역의 욜구(Yolngu) 부족이 치르는 제의의 과정과 지리적으로 반대편에 놓인 덴마크 사회문화의 현실을 연결한다. 전시는 방문자들에게 죽음, 애도, 기억에 대한 서구적 관행을 반성하게 하며, 죽음에 대한 전형적인 분위기를 교정하는 데 주력한다. 다소 시각적으로 지루하고 이질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전시 기획 의도가 관람자를 놀라게 하고, 끌리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방식이 포함되었으며, 미해결된 채 남아있는 여전히 생성적인 긴장을 확장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잔류 긴장을 ‘누더기의 끄트머리’라고 부른다.
당니 스튜달(Dagny Stuedahl) 외 2인의 ‘협업적 뮤지엄 큐레이션의 디자인 인류학적 접근’은 노르웨이 오슬로에 위치한 과학기술박물관(Teknisk Museum)에서 열린 ‘FOLK – 인종 유형으로부터 DNA 염기서열까지’(FOLK e From racial types to DNA sequences)의 협업적 전시 큐레이션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다.
인류학적인 연구, 골상학,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상 척도, 반인종주의 등 광범위한 담론을 다루는 이 전시는 전시 큐레이션의 핵심으로 관계적 활동, 번역, 상호호혜, 대화를 제시한다. 연구는 협업적이고 대화적인 큐레이션을 위한 방향으로 특정하고 다양한 사회, 역사, 지역적 조건을 포함할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설정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연구는 디자인 인류학자 스튜달(Stuedahl), 전시회의 수석 큐레이터인 레프카디토(Lefkaditou), 박물관 교육 담당인 스코툰(Skåtun) 및 이벤트 관리자인 엘렙슨(Ellefsen) 사이의 대화의 결과로서, 전시 기획에 참여한 참가자와 사진 자료를 통한 기억의 재전유, 현재의 선입견과 고정 관념에서 시작하여 인종 과학의 역사적 측면과 현대적 이해의 병치, DNA의 라벨링과 사회문화적 관계에 대해 다양한 행사 – 토론, 컨퍼런스, 오프닝, 투어, 영화 상영 등으로 구성했다.
그들은 한 가지 디자인 큐레이션의 방법으로 워크샵과 전시의 공간 중앙에 원탁을 배치하고 전체 공간을 비선형 경로로 구성해 개인들의 이야기와 다양한 서적, 자료, 담론들을 공유하여 참여자들의 활력을 이끌어 냈다. 이 과정은 디자인 인류학의 방식의 참여를 통해 경험적 지식을 정제하고, 전시 큐레이션이 취할 수 있는 여러 궤적에 관심을 불러모으고 참여자가 직접 지식을 생성하는 과정을 디자인해 협업 큐레이션을 지원한다.
또 하나의 인상깊은 사례 연구로, 피트 튜트넬(Piet Tutenel)과 앤 헤이라이언(Ann Heylighen)의 ‘취약성과 일상적 디자인의 섞어짜기: 소아암 병동의 수족관 주변에서의 조우’는 벨기에의 한 대학병원의 소아암 병동 내 수족관과의 인간의 마주침을 관찰한다.
이 연구는 외부 환경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소아암 환아들의 ‘일상’적 환경에 사물을 매개로 한 어떤 우연과 상상력의 발현을 보여준다. 론 와카리(Ron Wakkary)와 그의 동료들이 제안한 ‘일상적 디자인’의 개념을 통해, 우리가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상 인공물과 시스템을 얼마나 두름성있게(resourcefully) 사용할 수 있는 지 밝힌다.
이 연구에서 취약성은 ‘타자에 대한 일반적인 개방성’을 의미하며, 취약성에 대한 인식은 연구자와 어린이가 세상이 ‘불확실’하고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함께 경험하고 어설프지만 창의적인 재발견을 생성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병원에서 수족관과 물고기라는 사물이 소년의 성냥갑 자동차와 만나 ‘물고기와의 달리기 시합’으로 변모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상적 만남은 디자인의 사용성이 하나의 환경에서 고정될 수 없으며, 한 소년의 ‘초대’에 의해 사물이 의외의 용도로 바뀌는 리디자인의 개념을 보여준다. 이 연구의 저자들은 일상적 디자인과 디자인 인류학의 결합은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한 우리 보통의 삶의 형태를 개선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인류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지만, 문명으로 은폐된 현인간에게 감춰진 인종, 민족, 동식물, 환경 등과 떨어질 수 없는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학은 은폐와 문명과 야만의 대립을 넘어 ‘야생의 상태’로 전환하는 학문이라고 썼다. 이것은 인간, 자연, 사물이라는 서로의 타자성을 극복하는 형질 변환으로서 인문학이다. 디자인과 ‘디자인 인류학’이 전체를 하나로 함축하면서도 헝클어진 끝트머리를 포함하는 트랜스듀서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이번 ‘디자인 인류학’이 던지는 화두가 아닐까.
상반기 연구 중에 디자인과 인류학에 대한 이 3편의 연구 외에도 2편의 논문이 더 있다. 테레사 팔미에리(Teresa Palmieri) 외 2인의 ‘협업적 생산, 큐레이팅, 주거 패턴의 재구성: 주거 교외의 지속가능한 주거 미래를 위한 디자인 인류학적 접근법’(Co-producing, curating and reconfiguring dwelling patterns: A design anthropological approach for sustainable dwelling futures in residential suburbs)과 매테 케어스고르(Mette Gislev Kjaersgaard) 외 2인의 ‘현장 연구로서 디자인 게임: 디자인 인류학적 관점에서 디자인 게임의 재고’(Design games as fieldwork: Re-visiting design games from a design anthropological perspective)가 있다. 관심이 간다면 더 살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