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30 | 벌들의 도움으로

Editor’s Comment

쾌속조형의 반대에 서 있는 완속조형의 사례. 혹은 동물의 힘을 빌린 디자인. 토마시 가브즈딜의 ‘벌들의 도움으로’는 일주일 동안 4만 마리의 꿀벌이 빚어낸 꽃병입니다. 하이테크와 대비되는 로우테크, 인간의 공예가 아닌 동물의 공예. 또 꽃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벌과 꽃병은 멋진 한 쌍이기도 하지요.

일반적으로 RP(Rapid Prototype) 기술은 시제품이나 모델을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지만, 특정한 경우 RP로 곧 완제품생산 단계를 대체하기도 한다. Material.MGX나 FRONT의 가구, 전등 등이 그러한 사례로 손꼽힌다. 이들은 복잡한 구조와 디자인조차 단 번에 소화하는 3차원 프린팅 기술의 힘을 극대화한 제품을 통해, 디자인 프로세스의 하이테크적 국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토마시 가브즈딜(Thomáš Gabzdil)의 작업은 그와는 정반대 지점을 향해 있다. 그는 RP와는 정반대의 개념, 즉 ‘SP(Slow Prototype)’이라 부를 만한 디자인 과정을 통해 흥미로운 제품을 창조해냈다. 앞서 2007 밀라노 가구박람회 리뷰에서 잠시 소개했던 바, 그의 꽃병 ‘벌들의 도움으로(With a little help of the Bees)’는 4만여 마리의 벌들이 일주일에 걸쳐 부지런히 만들어낸 작품이다. 

토마시 가브즈딜은 왁스 시트로 꽃병의 기본 형상을 잡고, 벌들이 그 모양대로 집을 짓도록 모니터링했다. 벌들은 꿀과 밀랍으로 시트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에서 집을 지어가며 꽃병의 모양을 잡아나갔다. 디자이너가 한 일은 벌들이 본래의 디자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것, 그리고 언제 이 꽃병을 벌들로부터 떼어낼 것인지 결정하는 일 정도였다. 소재의 생산과 제품의 생산 모두 벌이 도맡은 셈이다. 그렇게 하나의 꽃병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일주일이었다.

‘벌들의 도움으로’는 디자이너가 통제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를 디자인 안에 도입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 하다. 가령 꽃병의 어느 부분이 좀 튀어나왔다고 해서 벌들에게 “여기를 좀 다듬어 달라”고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디자인 과정에 동물을 참여시킨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다 – 가령 FRONT의 ‘쥐 벽지(Rat Wallpaper)’는 쥐들이 벽지를 뜯어먹은 자욱을 ‘문양’화 한 제품이다. 

기술과 트렌드가 속도의 경주를 펼치는 오늘날의 디자인 씬을 돌이켜 볼 때, 토마시 가브즈딜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느림’을 강조하는 선택을 했다. 그렇다고 인간의 ‘손’을 강조하는 전통적 공예 단계로 회귀한 것도 아니다. 사실 제품의 조형을 값비싼 3차원 프린터가 담당하건, 4만 마리의 벌이 담당하건 간에 조형의 수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동일하다. 다만 토마시 가브즈딜은 ‘슬로우 프로토타이핑’을 통해 속도와 매끈함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 designflux.co.kr

기사/글에 대한 소감과 의견을 들려주세요.

More

2009-05-21 | 루빅스 큐브로 만드는 글자

‘학생들의 디자인’은 주요한 뉴스 유형 중 하나입니다. 2009년의 오늘자 뉴스도 여기에 속하지요.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 졸업을 앞두었던 예비 타이포그래퍼 야스 바쿠는 루빅스 큐브를 폰트 생성기로 변형시켰습니다. 놀이의 즐거움을 간직한 디자인으로, 그해 여러 매체에 소개되었던 작업입니다.

2010-05-31 | 팬톤 호텔

팬톤의 컬러칩은 팬톤의 주력 상품이기도 하지만, 자체로 팬톤을 상징하는 디자인 자산이기도 하죠. 컬러칩의 모양새는 팬톤과의 ‘협업’을 원하는 여러 브랜드의 제품에 널리 활용되고, 또 팬톤의 자체 라이프스타일 소품군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2010년 팬톤은 브뤼셀에 호텔을 열며, 소위 ‘팬톤 유니버스’를 소품에서 공간으로 확대했습니다. 다만 더 이상 팬톤 호텔을 방문할 수는 없으니, 팬톤이 떠나고 이미 다른 호텔이 운영 중입니다.

2009-07-29 | 산업디자인계 트렌드세터 10인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가 아직도 진행 중이던 2009년, <포브스>는 산업디자인계의 트렌드세터 10인의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경제위기가 불러온 소비의 변화에 가장 먼저 응답할 분야로서 산업디자인을 지목하고, 그 분야의 트렌드를 이끄는 인사들을 선정한 것인데요. 과연 어떤 이름들이 명단을 이루었을까요. 2009년 오늘의 뉴스에서 재확인해봅니다.

2006-09-14 | 지난 40년 미국 최고의 잡지 표지 40선

2005년 10월 17일, 미국잡지편집인협회는 ‘1965년부터 2005년까지, 지난 40년 역대 최고의 잡지 표지 40선’을 꼽았습니다. 당대와 긴밀하게 호흡하는 잡지 매체의 표지에 담긴 역사 그리고 어떤 표지들이 거둔 탁월한 성취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획이었지요. 디자인플럭스에서는 이 40개의 표지 목록을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되돌아보았습니다. 

Designflux 2.0

Designflux 2.0는 여러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에세이, 리뷰, 뉴스 편집에 참여를 원하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